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표트르 1세 (문단 편집) === 논란 === 러시아의 서구화나 중앙집권화라 하면 대개 표트르 1세를 떠올리지만 표트르 1세의 개혁이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그렇지 과연 본질적인 변화가 있었지에 대해서는 제정 시대 학자들부터 논란이 분분했고 실제로는 부황 [[알렉세이 1세]]가 기반을 마련한 플랜의 급진적인 진행에 불과하다던가 시대의 흐름을 잘 탔을 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표트르 1세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파벨 밀류코프]]의 경우 개혁은 러시아 국가 발전 양상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표트르 1세는 단지 그것을 촉진하면서 흐름을 잘 탔을 뿐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지는 않았다고 평했다. 게다가 이는 당대인들이 표트르 1세의 계몽자로서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그 이전 시대를 '후진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왜곡한 경향이 있다는게 밝혀짐으로서 더더욱 복잡해졌다. 즉 표트르 1세 이전과 이후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주장은 오히려 정치적, 이념적으로 만들어진 '''표트르 전설(Петровская Легенд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애시당초 러시아는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에 [[이반 3세]]가 바로 그 [[신성로마제국]] 카이저한테조차 대등한 황제임을 내세웠고[* 즉 애시당초 차르-임페라토르를 동양적인 왕-황제 개념으로 보는게 잘못되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인정받았다. 또한 [[보리스 고두노프]] 시절부터 군사 및 정치 제도에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모방했으며 서구식 예술작품이 유행했다. [[알렉세이 1세]] 재위기에 모스크바 총대주교 필라렛[* 당시 차르와 함께 공동통치자였다.]의 주도로 [[구스타프 2세]]의 스웨덴군을 모방한 군사 분야의 서구화가 진행되었으며 스웨덴 및 네덜란드와 활발한 국제 무역이 시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표트르 1세가 주목받는 것은 군사, 정치, 기술, 행정 등의 분야에서 전례 없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수염을 자르던가, 서유럽식 의복을 입다던가 하는 일반 평민들의 생활 양식에 관여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